퇴사는 단순히 회사를 그만두는 사건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퇴사는 감정적으로도 인생의 ‘큰 이별’에 가깝습니다. 매일 가던 공간, 매일 만나던 사람들, 익숙한 업무 루틴에서 벗어나야 하는 순간. 이 변화는 두려움, 안도, 후련함, 허탈함, 분노, 슬픔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한꺼번에 몰고 옵니다.
그때부터 감정이 나를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내가 감정을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글쓰기였습니다. ‘나를 돌아보는 글쓰기’는 감정의 파도를 수면 위로 올려놓는 작업이었습니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마음 어딘가에 고여 썩는 감정들을 언어로 꺼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해소되는 게 많았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단순히 퇴사라는 사건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얽힌 감정의 층위, 나의 가치관, 상처와 바람까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퇴사 후 무엇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퇴사라는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 건너느냐였고, 글쓰기는 그 배가 되어주었습니다.
나를 돌아보는 글쓰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처음부터 거창한 글을 쓰려 하면 부담이 됩니다. 퇴사 직후의 감정은 정리되지 않았고,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활용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쓰기는 감정을 정리하고,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퇴사 직후 1주일간 사용한 질문들
오늘 가장 많이 떠오른 생각은 무엇이었나
지금 내가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퇴사 결정에서 내가 자랑스러웠던 부분은
후회되는 순간이 있다면, 그 안에 어떤 욕구가 있었을까
지금 나를 괴롭히는 말투는 무엇인가
이렇게 감정을 묻고, 나의 말과 감각을 적어보는 작업은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드러내줍니다. 예를 들어, 퇴사 이후 “난 참을성이 부족해”라는 말이 계속 떠오른다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과거 상사의 말이 내 내면화된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죠. 그런 과정에서 감정은 점점 구체화되고, 감정의 ‘주체’를 다시 내가 쥘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글을 쓰며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감정에 ‘정답’을 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퇴사 후 슬펐다고 해서 후회하는 게 아니고, 기뻤다고 해서 쉽게 그만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모든 감정은 '그럴 수 있는 것’이라는 태도로 글을 써나가는 것. 판단 없이 적는 글쓰기가 회복의 첫 단추가 됩니다.
감정의 이름을 붙이고 나를 회복하는 시간
퇴사 이후의 감정은 흐릿하고, 얽혀 있고, 때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슬픈 건지, 무엇이 분노인지, 어떤 감정이 원망이고 어떤 게 후련함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 복잡한 감정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오늘 하루 종일 무기력했다”고 적었지만, 그 밑에 쓰다 보니 그 감정은 단순한 무기력이 아니라 ‘쓸모없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또 다른 날에는 “괜히 화가 났다”고 했지만, 글을 읽어보니 그건 ‘내가 존중받지 못했다는 오래된 상처’에서 비롯된 분노였습니다.
글은 감정을 말보다 더 정직하게 드러내줍니다. 왜냐하면 말은 흘러가지만, 글은 남고, 나를 멈춰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감정에 이름을 붙이다 보면, 내가 나를 객관화할 수 있고, 감정이 휘두르는 힘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변화는, 그 감정을 수용하는 태도였습니다.
“지금 이 감정이 불편해도, 이 또한 나의 일부다.”
이렇게 말하며 글을 쓸 수 있게 된 순간, 나는 퇴사라는 사건을 넘어, 내가 나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퇴사 후 감정 회복을 위한 일상 글쓰기 루틴 만들기
퇴사 후 일정이 자유로워지면서, 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 회복을 위한 글쓰기 루틴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복잡한 방식은 아니었고, 딱 세 가지 원칙만 정해두었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루틴 3단계
하루 한 문장 감정 날씨 기록하기
“오늘 마음은 흐리고, 무력감이 오후까지 이어졌다.”
감정을 가볍게 점검하면서 자기 인식 능력을 높이는 연습
감정에 대한 짧은 이유 써보기
“오늘 아침에 친구와 연락이 잘 안 돼 외로움을 느꼈다.”
감정의 원인을 파악하면, 감정이 막연한 불안에서 벗어남
나를 다독이는 문장 한 줄로 마무리하기
“그래도 오늘은 나에게 시간을 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감정 해소보다 더 중요한 건,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 한 마디
이 루틴을 매일 아침 또는 저녁 10분씩만 해도, 감정이 어지럽게 떠다니지 않고, 글이라는 구조 안에서 정돈됩니다. 그리고 이 짧은 글쓰기 시간이 내 감정을 회복시키는 작은 정착지가 되어줍니다.
퇴사 후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보다, 내 감정을 다루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글쓰기는 이 감정의 혼돈 속에서 중심을 잡게 해줍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음 직장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