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표현 훈련 중 하나로 감정 낙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텍스트 대신 그림이나 선,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는데, 처음에는 다소 유치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해볼수록 의외의 효과가 있었고, 특히 분노 감정에 대해선 놀랄 만큼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의 날카로움, 폭발감, 끓어오름 같은 것을 그림으로 쏟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보다 빠른 손 그림으로 터뜨린 감정
처음 감정 낙서를 시도했을 때 저는 도화지 하나와 색연필 몇 개만 준비했습니다. 복잡한 도구는 필요 없었습니다. 중요한 건 어떻게 그리느냐보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가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분노의 감정을 느낀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A4 용지를 꺼내 무작정 선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삐뚤빼뚤한 선, 뾰족한 형태, 검고 짙은 색이 종이 위에 쏟아졌습니다. 눈으로 보기에 그 그림은 아름답지 않았지만, 나에겐 분명 해방의 경험이었습니다.
감정 낙서의 핵심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로 판단하거나 논리적으로 정리하지 않고, 오로지 손이 가는 대로 선을 그리고 색을 칠하며 분노의 에너지를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생각해보면 분노라는 감정은 매우 신체적입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이 떨리는 경험들. 이처럼 몸에서 시작되는 감정을 글로 붙잡는 건 오히려 역방향일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저는 ‘내가 이런 감정에 이토록 크게 반응하고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글로 쓸 땐 “오늘 상사가 무시하는 말을 했다. 화가 났다.” 정도로 간단히 정리되지만, 그림으로 표현할 땐 그 화가 얼마나 날카롭고 깊이 스며든 감정이었는지를 훨씬 명확히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색의 선택이나 선의 강도는 감정의 강도와 거의 비례했습니다.
그림 한 장이 완성되고 나면 놀랍게도 기분이 가라앉았습니다. 억지로 다독이거나 합리화하지 않아도, 종이에 감정이 옮겨졌다는 느낌 덕분이었습니다. 감정 낙서는 말보다 빠른 손으로 감정을 ‘터뜨리는’ 방식이었고, 이는 글쓰기로는 불가능했던 즉각적인 감정 배출의 창구가 되어주었습니다.
형태 없는 감정에 형체를 부여하다
감정 낙서의 또 다른 장점은, 형체 없는 감정에 형체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감정은 본래 무형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설명이 어렵습니다. 특히 분노는 때로 진짜 이유를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죠. 예를 들어 상사의 말에 화가 났지만, 사실 그 감정은 인정받지 못한 상실감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쌓여 있던 무시당한 기억이 터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림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감정의 뿌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림 낙서를 하면서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독 뾰족하고 날카로운 선이 반복되는 그림은 대체로 자기 방어적 상태일 때 그려졌고, 동그라미나 반복적인 문양은 무기력하거나 억눌린 감정을 표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그리던 낙서였지만, 점점 그것이 감정의 지도가 되어갔습니다. 매일 한 장씩 그려보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그 그림들을 다시 보니, 감정이 변화해가는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에서 강렬했던 붉은 계열이 점점 옅어지고, 선의 움직임도 점점 부드러워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분의 변화가 아니라, 감정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 자체가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감정 낙서는 예술이 아닙니다. 아름다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에너지를 시각적으로 비워내는아주 효과적인 글쓰기의 확장 방식입니다. 감정이 모호할수록, 낙서는 선명한 힌트를 줍니다.
감정 낙서가 나에게 준 진짜 변화
일주일간 감정 낙서를 실천한 후, 제가 가장 크게 느낀 변화는 감정을 통제하려는 습관에서 감정을 이해하려는 태도로 전환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전의 저는 감정이 올라오면 그것을 억제하거나 글로 정리하려 했습니다. 그마저도 잘 안 될 땐 스스로를 다그치며 왜 아직도 이런 감정에 휘둘리는지를 자책하곤 했죠.
하지만 감정 낙서를 통해 저는 감정을 ‘그대로 두는 법’을 배웠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 그림을 그리는 손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과 색이 내 감정을 대변해주면서, 나는 비로소 내면의 시끄러운 에너지를 말 없이 비워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감정 낙서를 한 날과 하지 않은 날의 심리적 차이였습니다. 낙서를 한 날은 확실히 마음이 가벼워졌고, 밤에 잠드는 속도도 빨랐습니다. 감정이 덜 억눌려 있으니, 다음 날 아침에도 한결 맑은 정신으로 일상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은 습관 하나가, 감정 관리의 루틴을 바꾸는 데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매일 밤 글쓰기와 함께 5분의 감정 낙서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말로 풀 수 없는 감정, 특히 분노나 억울함 같은 뜨거운 감정은 그림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감정은 텍스트로 다루는 식입니다. 감정은 단순히 참거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방식의 선택지가 많아야 비로소 건강해질 수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